5.18 당시, 화순 ‘다이너마이트’수송 작전

'오월' 광주 사수 '수문장' 역할'
"광주시위대와 연대한 화순군민 위대한 승리"

박하은 기자 he7677@naver.com
2017년 05월 17일(수) 01:54
화순군 동면 복암리에 위치한 화순광업소 인근에는 5·18 사적지를 상징하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37년이된, 이 표지석은 광업소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대로변에서 세월을 이긴채 그대로 서있다.



화순광업소는 많은 이들이 화순탄광으로 알려진 곳으로, 전남도청을 사수했던, 다이너마이트가 유출된 본거지이였다.



5·18 민중항쟁 당시 광주 시내가 피로 물들었다는 비보는, 삽시간에 광주 인근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지금은 광주에서 10여 분 거리의 화순에, 18일 이후 벌어진 공수부대의 만행이 낱낱이 전해져, 화순군민들이 공분을 일으키면서 시발점이 되기 시작해 전남ㅈ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있었던 21일, 그 분노가 절정에 달하여, 상황을 접한 화순읍민 2000여 명이 화순군청과 화순경찰서 앞 사거리에 모여 들었다.



삼삼오오 모여 구호를 외치고 분노를 표현하는 군민들을 위해, 아낙네들이 구 버스터미널 인근 시장에서 김밥을 준비하고 간식을 나누어주며, 광주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시위대 연대를 이뤄갔다.



당시 화순군 내에서 이례를 찾기 힘든 운집이었다. 현재 이 곳 집결 장소는 모두 5·18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이날 광주에서 벌어지는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화순읍민들은 무기를 구하기 위해 화순을 찾은 돌멩이나 각목으로 버티던 시위대가 무장을 결단하고 광주에서 가까운 나주·화순·보성 등 타 지역으로 무기 공수에 나선 시위대 트럭들은 시위차량에서 내린 청년들이 광주의 처참한 상황을 전달하며 무기 조달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시위대에 합세한 일부 화순읍민들은 함께 화순경찰서와 인근 파출소로 향해 750여 정의 총기를 탈취했다. 시위대가 시민군이 되는 순간이었다.



계엄군의 폭력을 방어하기 위해 시작한 무장. 그 절박한 몸부림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어느 곳에서도 무기를 순순히 내주지 않자 시위대가 직접 무기고를 턴 것이었다.



무장을 한 시위대의 불안감은 광주와 화순의 경계인 ‘너릿재’를 넘던 차량이 총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나돌자 화순 시위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으며, 계엄군의 화순 진입은 시간 문제라는 불안감에 ‘예비군 동원령’까지 내려질 정도로 움직임이 급박했다.



소집된 예비군들은 화순지역 청년들에 한해 총기 배분을 시작했으나, 계엄군이 화순으로 진입할 가능성이 희박해졌다는 이야기에, 총기를 그대로 둘 경우 안전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에 곧바로 총기 회수작업이 진행됐고, 회수된 총기는 4.5톤 트럭 2대에 실려 인근 ‘만연사’로 옮겨졌다.



현재 5·18사적지로 지정된 만연사 가기전 표지석 옆은 바로 화장실이 차지하고 있어 긴박했던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지만, 시위대가 무기를 손에 넣고 좌불안석이었을 당시 불안한 민심만은 예측할 수 있다.



총기 반납을 거부하는 이들의 반발도 거셌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확실한 방어를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총기만 지급받은 이들은 실탄을 구하기 위해 714예비군관리대대를 찾았으나 대대장은 이들을 설득하며 회유할 뿐 실탄을 내주지 않았다.



실망한 시위대들은 실탄 구하기를 포기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미 날은 저물어 오후 9시 경. 화순군 동면 운풍리 신운마을 앞길에서 대학생들이 탄 픽업차량을 마주친다. 우연한 이 만남으로 시위대는 총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무기를 확보하게 되었다.



픽업트럭에 타고 있던 두 사람은 시위대의 무기를 구할 수 없느냐는 물음에 결합되지 않은 다이너마이트를 건네주었다.



그때서야 시위대 입에서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다이너마이트라면 계엄군들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데 충분한 방어기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당시 화순광업소에 근무하던 13명의 시위대가 다이너마이트 조립 작업을 마친 뒤 또다시 목숨을 건 여정에 나섰다. 차에 싣고 있던 다이너마이트가 터질까 노심초사하며 광주에 도착한 시각은 22일 아침 7시였다.

 

이미 전날 밤 전남도청 지하실에는 8톤트럭 1대분의 다이너마이트가 옮겨져 있었다. 이 역시 무기를 구하기 위해 화순광업소에서 들렀던 시위대를 통해 운반된 것들이었다.



5·18증언록에 따르면 당시 험악한 분위기를 읽은 화순광업소 직원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다이너마이트를 내주었다고 한다.



화순광업소에서 유출된 다이너마이트는 이후 27일까지 7일 동안 광주 시민들의 수문장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이 다이너마이트는 계엄군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전남도청 주변 담장에 설치되지만 한 번도 공격을 위해 사용된 적은 없었다고 한다.



5·18민중항쟁 당시 광주시민들이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너릿재·화순광업소 등에서 확보한 다이너마이트 덕분으로, "광주시위대와 연대한 화순군민 위대한 승리"인 것이다



또 하나의 비보였던, 주남마을 학살 사건은, 광주에서 시외로 나가던 버스에 탑승한 시민 17명이 공수부대에 의해 거침업는 총탄으로 모두 살해 당했는데, 옛 너릿재 가는 부근인 주남마을인 광주에서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당시 화순에선 딸기 농사가 한창이었고 젖소농가도 많았는데 5·18이후 딸기밭이 엉망진창으로 쑥대밭으로 변하고 젖소에게 우유가 나오지도 않게 되었다.



광주 외곽에 진을 치고 있던 계엄군들이 하도 발포를 해대니 소들이 놀라 스트레스를 받은것이었다.



한편, 화순에 있는 5·18 사적지는 총 10개로 화순광업소와 군청 앞, 시외버스터미널 옛터, 화순역 광장, 너릿재, 화순경찰서, 화순경찰서 사거리, 옛 714대대 앞, 만연사 입구, 구 역청공장내 등이 지정돼 있다.

박하은 기자 he76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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