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홍선생 ‘운인유고’ 출판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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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선생 ‘운인유고’ 출판기념회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아버지 학술행사 개최



□ 운인송홍선생 문집발간위원회(김성인 위원장)와 전남대 광주학생독립운동연구소(장우권 소장)는 일제침략기 3대 전국적 항일독립운동이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 84주년을 맞아 2013년 11월 15일(금) 오후 2시 화순군청 대강당에서 화순군의 후원을 받아 운인 송홍(宋鴻) 선생 『운인유고(雲人遺稿)』출판기념회와 송홍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행사를 갖는다.

<>□ 송홍(宋鴻) 선생은 1872년 9월 7일 화순군 도암면 운월리 출생으로 구한말의 애국지사였던 문충공(文忠公)연제 송병선(淵齋 宋秉璿) 선생에게서 배웠으며, 단발령과 을사늑약 체결 때는 수차 고종황제께 그 부당성을 상소했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을 지어 이 일로 인해 일본헌병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해외로 망명한 항일독립운동가이다.
□ 그 후 다시 고국에 돌아온 선생은 광주고보에 재직하면서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한국역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러던 중 나주역에서 발생한 일본인 학생의 조선 여학생 희롱사건을 계기로 1929년 11월 3일에 터져 나온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지역 학생들이 일제침략에 대해 맨주먹으로 맞섰던 장거로 이후 들불처럼 전국은 물론 만주와 해외까지 번져 무려 5만4천명의 학생이 참가하여 민족독립을 절규하고 ‘타도 일본제국주의’를 외치는 거대한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광주고보생들의 열렬한 항일투쟁의 이면에는 선생의 영향이 절대적이었고 그의 항일정신과 겨레사랑 실천이 오롯이 학생들에게 계승되었던 것이다.
□ 그 후 선생은 광주고보의 재학생 대다수가 검거와 수감, 퇴학처분 등이 계속 될 때 신병을 핑계로 장기 결근으로 저항하다가 퇴직을 강요당하였으며, 1930년 2월 19일 사랑하는 제자들이 공판을 받던 날 시 한 수를 남기고 홀연히 교단을 떠났다.
그로부터 15년 후 광복된 조국의 교육현장에 다시 나와서 광주고보(현 광주제일고)와 광주의대(현 전남대 의대) 등에서 교편을 잡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해방 후 혼란기 속에서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다가 1949년 6월 18일 78세로 영면하였다.
이와 같은 선생의 의와 덕을 기려 1967년 11월 2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탐 앞에 제자들이 선생의 흉상을 건립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추모하고 있다.
□ 이번에 운인송홍선생 문집발간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사) 금계전통문화진흥원이 번역하고 화순군이 펴낸 운인유고(雲人遺稿)는 2권 1책으로, 「권1」에는 한시 160제(題)에 426수(首)가 수록되어 있으며,「권2」에는 소(疏) 1, 잡저(雜著)1, 설(說)1, 서(序) 2, 기(記) 7, 묘문(墓文) 1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권2」다음에 있는 부록(附錄)에는 행장(行狀)과 묘표(墓表), 운인송홍선생유고 복사발간 서문(雲人宋鴻先生遺稿 複寫發刊 序文), 발간후기(發刊後記), 발(跋), 후기(後記) 등이 첨부되어 있다.
□ 운인송홍선생 문집발간위원회 김성인 위원장은 “늦었지만 송홍 선생과 같이 일제의 회유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얼을 후학에게 가르친 참스승의 모습을 다시 생각하며, 서구 물질문명과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밀려 민족의 바른 역사와 전통을 외면해 온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학문과 진리, 도와 인생의 원리를 밝히며 살았던 송홍 선생의 고결한 인품과 향기로운 삶이 ‘운인유고’ 발간을 계기로 오늘을 사는 현대인은 물론 후손들에게까지 전해지고, 아울러 호남학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선생의 위상과 역할이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화순클릭 570yong@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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