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이면 달래강에서 그물을 걷는 어부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봄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인가? 여름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닌 모양이다. 괴산 달래강이 연일 안개를 피워 올리니 말이다. 여름에 접어들면 괴산은 달래강을 낀 곳마다 어김없이 새벽안개 속에서 허우적댄다. 안개가 그려내는 달래강 풍경은 수묵화처럼 담담하다. 들뜬 마음, 너저분한 생각 내려 누르기엔 안개만 한 게 없다.
괴산행은 새벽길을 틈타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바로 안개 때문이다. 요즘 달래강이 지나는 곳마다 안개가 구름처럼 쏟아진다. 복사냉각으로 차가워진 공기가 따뜻한 수면과 만나면서 발생하는 강안개다. 내륙산간의 경우 지형적 특성상 복사냉각이 심해 안개의 발생빈도가 높다. 전체 면적의 76%가 산으로 이루어진 데다가 강과 계곡 또한 곳곳에 자리한 괴산은 그야말로 안개의 고장일 수밖에 없다.
안개는 세상을 지우는 힘으로 마음의 상처도 지운다. 안개 속에 오래도록 서 있노라면 공허함이 물밀 듯이 밀려든다. 안개는 세상의 욕심이 다 부질없다고 말을 건넨다. 어쨌든 그 안개를 만나기 위해 괴산으로 새벽길을 달린다.
괴산에는 달래강이 젖줄처럼 흐른다. 여러 계곡이 그 강에서 갈라서거나 합류한다. 화양구곡, 선유구곡, 쌍곡구곡 등 괴산의 명물계곡들이다. 달래강은 속리산 비로봉 서쪽에서 발원해 보은 내북면과 괴산 청천면·괴산읍, 충주 달천동을 거쳐 남한강에 합류되는 큰 강이다. 강의 총 연장이 무려 300리(약 118㎞)에 이른다. 지역에 따라 청천강·괴강·달천·박대천·감천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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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양구곡.
달래강의 안개 낀 풍경은 청천면을 관통하는 상류 쪽이 아름답다. 사담·후평·도원·후영·지촌리 등지에 특히 안개가 짙다. 강을 낀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기기에 더 없이 좋다. 이 지역은 화양계곡과 인접해 있어서 찾아가기가 어렵지 않다. 중부내륙고속국도 괴산나들목에서 나온 후 19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보면 부흥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37번 국도로 오른다. 5분쯤 달리면 금평삼거리에 닿는데, 좌회전해서 32번 지방도를 이용하면 된다.
달래강은 괴산 사람들에게 생명의 강이다. 이 강의 물을 끌어다가 논에 물을 대고, 이 강에서 물고기와 다슬기를 잡는다. 도원리 일대에는 달래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이 많다. 정식으로 어업허가권을 받아 고기를 잡는다.
도원리 사람들은 어스름이 채 걷히지 않은, 그래서 안개가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새벽이면 밤새 그물을 쳐놓았던 강으로 향한다. 꺽지, 쉬리, 모래무지, 어름치, 황쏘가리 따위가 풍성하게 걸리는 그물이지만 이따금 헛걸음을 할 때도 있다. 수달이 약삭빠르게 주린 배를 채우고 가는 경우다. 달래강에는 유난히 수달이 많다. 수달의 ‘달’자를 떼어 달래강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수달 탓을 하지 않는다. 달래강이 사람만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달도 달래강의 주인이고, 부연 안개 속에서 하얀 날개를 펼치며 날아가는 백로도 달래강의 주인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에게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불청객이다. 그래서 달래강의 어부들은 그물질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안개로 인해 달래강의 아침은 늦게 열린다. 태양이 꽤 높이 솟아올라도 안개는 쉽사리 걷히지 않는다. 동이 트고 두세 시간 동안 그렇게 안개는 버티다가 결국 태양의 열기에 녹아 없어진다. 세상을 지웠던 안개가 사라지자 괴산의 멋진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도원리와 가까운 화양구곡은 반드시 들러봐야 할 곳이다. 도원리에서 약 5분이면 화양구곡 입구에 닿는다. ‘아홉 개의 비경을 품은 화양동의 계곡’이라고 해서 화양구곡이다. 조선 후기 대표적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은거했던 계곡이다. 화양구곡이란 이름도 우암이 붙인 것이다. 사방으로 높은 산이 두르고 있고, 계곡은 산과 산 사이의 골을 따라 굽이치며 흐른다.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경천벽부터 운영담, 읍궁암… 와룡암, 학소대, 파천 등 구곡이 펼쳐진다. 화양구곡은 왕복 7.4㎞의 평지로 걷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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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개산 깊이 자리해 호젓한 각연사.
퇴계 이황이 송정마을 함평 이씨댁을 찾았다가 경치에 반해 아홉 달 동안 묵었다는 선유구곡, 퇴계와 송강이 노닐던 쌍곡구곡도 찾아볼 만하다. 쌍곡구곡은 걷기보다는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낫다. 517번 지방도를 따라서 선유구곡에서 칠성면 방면으로 구곡들이 길에 늘어서 있다.
쌍곡구곡에서 자동차로 15분가량 떨어진 곳에는 각연사가 있다. 보개산(709m)을 업고 있는 절로 신라 법흥왕(515년) 때 창건됐다. 법주사의 말사로 대웅전과 비로전 등의 대표적인 건물이 있다. 대웅전에는 하얀색 분칠을 한 것 같은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33호)이 있다. 9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그 모양이 무척 단정하다. 조각된 선은 천 년 세월을 더 견뎌왔지만,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
다른 절들도 많지만, 각연사를 특히 추천하는 이유는 종교를 떠나서 찾아가는 길이 무척 호젓하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부터 4.5㎞가량 산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숲길이 그만이다. 각연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10여 분 더 오르면 통일대사탑비(충북유형문화재 제2호)가 나오는데, 그 길 역시 일품이다. 마음을 게우러 가기에는 더 없이 좋은 길들이다.
만약 시간이 된다면 연풍면 원풍리도 찾아가 볼 일이다. 조령민속공예촌에서 각종 한지와 도자기를 만들어볼 수 있다. 공예촌 맨 위쪽에는 3대째 전통방법을 고수하며 한지를 제작하는 신풍전통한지마을이 있다. 한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마솥에 닥나무를 찌고 껍질을 벗긴 후 천연잿물에 불려 곤죽을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한지마을에 가면 그 모습을 생생히 지켜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5인 이상 단체의 경우 한지제작 전 과정을 체험할 수도 있다.
일요신문 제공 570yong@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