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화를 ‘마리한화’라고 부르는 야구팬이 많아졌다. 마약류인 ‘마리화나(대마초)’를 응용한 것인데, 마치 마약처럼 중독성 있는 야구를 한다는 의미에서다. 각종 변칙 운영이 속출하고, 혹사 논란이 벌어질 만큼 투수들의 역투가 연일 이어지는 데다, 역전승과 역전패가 밥 먹듯이 나오는 게 한화 야구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경기 내내 긴장감 속에 피가 마르지만, 팬들은 마지막 순간 힘겹게 승리가 확정되는 짜릿함에 두 배의 환희를 느끼곤 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화나 이글스’로 통하던 팀이었기에 격세지감이다.
요즘 야구계에는 이렇게 기발한 신조어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인터넷을 통해 팬들의 커뮤니티가 확장되고 야구의 세세한 부분까지 관심이 폭발적으로 높아지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이미 야구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하나의 ‘일상어’로 취급될 만큼 보편화된 표현들도 많다. 물론 재미로 시작된 신조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남용할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야구를 보는 즐거움을 더 높이는 차원에서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진정한 야구팬이라면 모를 수 없는 대표적인 야구계의 ‘은어’들을 정리해봤다.
‘DTD’는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광범위하게 쓰이는 표현이 아닐까. DTD는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뜻을 담고 있는 ‘Down team is down’의 앞 자를 딴 말이다. 한눈에 봐도 영어 문법에는 전혀 맞지 않는 전형적인 한국식 영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이유로 더 친숙하고 장난스러운 느낌을 준다.
이 말은 2005년 현대 감독이던 김재박 현 KBO 경기감독관의 한마디에서 비롯됐다. 아마 당사자인 김 감독도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이렇게 오랫동안 회자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김 감독은 그 해 최약체로 분류됐던 롯데가 5월까지 상위권을 지키자 “앞으로 내려갈 팀은 분명히 나올 것”이라고 평가했다. 콕 집어 롯데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타깃이 어느 팀인지는 분명해 보였다. 실제로 그 해 롯데는 4강에 들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은 훗날 김 전 감독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그가 LG 지휘봉을 잡았던 2007년부터 2009년까지, LG는 늘 5~6월까지 상위권을 달리다가 시즌 중반을 넘어가면서 미끄러져 4강 진출에 실패하곤 했다. 한동안 LG가 DTD의 대표적 사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LG는 마침내 가을잔치의 한을 풀었고, 이제는 모든 팀에게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반대말도 생겼다. ‘UTU(Up team is up)’, 즉 “올라갈 팀은 올라간다”는 의미다. 삼성처럼 시즌 초반에 고전하다가 중반 이후 치고 올라가는 팀에 주로 쓰인다. 최근에는 ‘내팀내’, ‘올팀올’처럼 한국식 표현을 쓰기도 한다.
# FA로이드와 먹튀
‘FA로이드’는 선수들이 FA(프리에이전트)를 앞둔 시즌에 평소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낸다는 뜻. 선수들의 경기력을 불법적으로 향상시키는 금지약물 ‘스테로이드’에 FA를 합성했다. FA라는 기회가 마치 스테로이드처럼 선수들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불어 넣는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조어다. 요즘처럼 FA 선수들의 몸값이 높아진 시기에는 더 유효한 단어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많은 선수들이 FA를 앞둔 시즌에 가장 몸 관리를 열심히 한다. 그 1년의 성적에 수십억 원이 좌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시즌에 반짝 활약을 하면서 그동안의 성적에 비해 좋은 대우를 받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8년간 꾸준히 좋은 성적을 올리고도 FA 직전 시즌에 부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헐값에 계약하는 선수도 있다. 그야말로 ‘복불복’인 셈이다.
관련 은어로는 다른 분야에서도 많이 쓰이는 ‘먹튀’가 있다. 돈을 ‘먹고 튄다’는 의미로, 말 그대로 거액의 계약을 성사시킨 뒤 부상으로 뛰지 못하거나 극심하게 부진한 선수들을 일컫는 단어다. FA 제도 초기에는 실제로 ‘먹튀’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모범 FA’들이 훨씬 많아졌다. 선수들이 ‘먹튀’라는 오명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할 뿐더러, 첫 FA에서 성공하면 두 번째 FA에서도 다시 대박을 터트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2013년 6월 7일 삼성 라이온즈와 두산 베어스의 경기에서 8회초 2사 만루 상황에서 등판한 삼성 안지만이 두산 윤석민을 삼진으로 잡고 환호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만루변태와 작가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잔루 만루’만큼 아쉬운 상황이 없다. 그러나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잔루 만루’가 가장 큰 짜릿함을 이끌어 낸다. ‘만루변태’는 ‘주자가 없을 때보다 오히려 주자가 꽉 찼을 때 느껴지는 긴장감과 스릴을 즐기는 투수’를 뜻하는 조어다.
삼성 불펜투수 안지만이 ‘원조’다. 안지만은 2010년 4월 9일 대구 KIA전에서 5-5로 맞선 연장 12회초 마운드에 올랐지만, 연속 3안타를 맞고 무사 만루 위기를 자초했다. 패색이 짙어 보였다. 그런데 그때부터 진가가 발휘됐다. 다음 타자 김상현~안치홍~이종범을 모두 삼진으로 잡고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쳤다. 이후 일부 팬들이 “안지만이 만루를 만들어준 덕분(?)에 오히려 더 짜릿한 장면이 연출됐다”고 감탄하면서 새로운 단어가 탄생한 것이다. 안지만은 이후 스스로 만든 만루는 물론 다른 투수가 만든 만루 상황도 완벽하게 막아내며 별명의 명성(?)을 드높였다.
현재 호주에서 뛰고 있는 한화의 레전드 투수 구대성도 만루변태와 관련한 일화로 유명했다. 대전고 시절 구대성은 그야말로 적수가 없는 초고교급 기량을 뽐냈다. 그러나 전국대회 도중 잘 던지던 그가 갑자기 9회에 연속 세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냈다.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에 깜짝 놀란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가자 고교생 구대성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기가 너무 느슨해진 것 같아서 긴장감을 좀 주려고 일부러 그랬습니다.”
감독은 고개를 갸웃하며 마운드를 내려왔고, 구대성은 거짓말처럼 무사 만루에서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 세웠다. 한화 투수들 사이에 전설로 남아 있는 무용담. 진정한 ‘만루변태’의 출발점인 셈이다.
유사한 표현으로는 불안한 마무리투수를 통칭하는 ‘작가’가 있다. ‘만루변태’와 달리, 명예로운 별명은 아니다. 주로 투수의 성을 앞에 붙여 ‘○작가’로 부르곤 한다. 처음 이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롯데에 부임한 외국인 감독 제리 로이스터는 사이드암 임경완을 마무리투수로 중용했지만, 임경완은 블론세이브를 허용하거나 베이스를 주자로 채우는 모습을 종종 보이면서 경기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곤 했다. 보다 못한 롯데 팬들이 마운드에서 드라마 같은 상황을 자주 만든다는 의미로 ‘임작가’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다른 팀에서도 마무리 수난시대가 종종 펼쳐졌고, 그때마다 새로운 작가들이 ‘등단’하곤 했다.
# 야잘잘과 야알못
‘야잘잘’은 최근 인터넷 댓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단어 가운데 하나. ‘야구는 결국 잘했던 선수가 계속 잘하게 돼 있다’는 의미다. 김인식 전 감독이나 김재박 전 감독을 비롯한 수많은 사령탑들의 지론이자, 많은 야구팬이 인정하는 명언이기도 하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타고난 재능이 없다면 성공하기 힘든, 냉정한 야구선수들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 단어가 등장한 계기는 SK 박재상이 당시 팀 선배였던 ‘국민 우익수’ 이진영(LG)에게 던진 질문에서 비롯됐다. 막 1군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박재상이 “형, 어떻게 하면 야구를 잘할 수 있냐”고 묻자 이진영이 “재상아, 야구는 원래 잘하던 사람이 잘해”라고 대답한 것이다. 실제로 학창시절에는 그다지 빛나지 않았다가 프로에 와서 최정상급으로 성장하는 선수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신고선수로 입단하는 아픔을 겪었다 해도, 두산 김현수나 넥센 서건창처럼 이미 확실한 능력 하나는 인정받은 케이스여야 프로 지도자들의 눈에 띌 수 있다. 많은 팀에서 시즌 도중에 반짝 활약하는 선수가 나타나곤 하지만, 시즌이 끝난 뒤에는 3할타자와 10승투수들의 명단이 매년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이유다. 비슷한 발음의 ‘야알못’도 댓글에 자주 보이는데 ‘야구 알지도 못하는 X들’이라는, 상대방을 비하하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외에도 재미있는 단어들은 많다. ‘엘넥라시코’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엘 클라시코(고전의 승부·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라이벌전)’에서 따온 단어. LG와 넥센이 만나면 유독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승부를 펼친다는 의미로 야구팬들이 붙인 이름이다. 특히 넥센에는 염경엽 감독부터 4번타자 박병호와 리드오프 서건창, 주장 이택근까지 LG와 관련 있는 인물들이 유독 많다. 그래서 두 팀 간의 승부가 더 흥미진진하다.
김동국 기자 371061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