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형수였습니다, 나라를 위험에 빠트린...”
검색 입력폼
피플

“나는 사형수였습니다, 나라를 위험에 빠트린...”

이선 화순군의회 의원의 1980년 5월...무자비한 총칼에 지옥이 된 광주

광주에 있었다. 무장한 군인들의 총칼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시민들을 보며 통곡했다. 곳곳을 다니며 광주의 실상을 알리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힘을 모으자고 호소했다.

마지막 순간 광주를 빠져나와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죽은 자들에 대한 미안함에 스스로 죄인이 됐다. 국가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세상은 그를 ‘폭도’라 불렀다. 1980년 5월 화순군의회 이선 의원도 광주에 있었다.

▲광주가 희생양? 광주로 가야한다!

군인세력이 권력을 잡으면서 시작된 ‘반독재·민주화’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계엄령이 선포됐고, 광주를 희생양삼을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했다. 무조건 광주로 내달렸다. 군 복무를 마치고 서울시립도서관에서 근무하며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터였다.

5월 17일, 광주 곳곳에서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시위에 참여하며 ‘나라가 이래서는 안된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계엄군 투입...총칼에 쓰러지는 시민들

18일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계엄군은 무자비했다. 도망가는 시민들의 등을 대검으로 찔렀고 쓰러진 시민을 군화발로 짓밟았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총검으로 중무장한 계엄군은 죽이려고 작정한 듯 손에 든 몽둥이로 얼굴과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시신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지옥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도 무장을 해야 한다”고 외쳤다. 중무장한 계엄군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시위대와 함께 무기를 구하러 집이 있는 화순으로 향했다.

▲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너릿재 넘어 화순에서는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언론의 보도가 사실인지,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눈으로 본 광주의 실상을 알렸다.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이 중무장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총칼을 겨누고,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고 외쳤다.

국민을 지켜야할 군인들이 국민들을 죽이고 있다고, 광주시민들이 죽고 있다고, 그들을 살려야한다고, 무장을 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고, 광주로 달려가자고 호소했다.

<>
▲무기를 들고 다시 광주로

분노한 주민들과 함께 화순경찰서와 화순광업소, 순천 송광까지 무기가 있다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고흥의 한 석산에서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광주로 향하던 시민군을 만나 무기를 나누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지만 무기를 든 그들은 ‘시민군’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됐다. 모아진 무기는 광주로 보내졌다. 5월 23일 광주와 화순의 길목인 주남마을에서 계엄군이 지나가던 버스에 총을 쏘고 시민들을 죽였다는 소식이 들렸다.

시민군과 함께 다시 광주로 향했다.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 수습하는 일을 맡았다. 더운 날씨에 구더기가 생긴 시신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상무관은 자식을, 아내를, 남편을, 부모를 잃은 이들의 피맺힌 절규로 가득 찼다.

▲최후의 결전...살아서 미안해

26일 저녁, 시민군에게 도청을 내줬던 계엄군이 시민군을 해산시키기 위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탱크와 장갑차로 사람들을 깔아뭉개고, 어린아이와 임산부에게까지 총을 쏘아댄 계엄군이었다.

최후의 결전,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누구는 남고 누구는 떠났다. 떠나겠다는 이들을 잡을 수도 없었다. 1시간 남짓한 교전에 수많은 시민군이 싸늘한 시신이 됐다.

이선 의원은 당시 상무관을 지키고 있어 죽음을 피했다. 죽음은 피했지만 마지막 순간, 함께 하지 못하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그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부른다.

▲상무대 영창...차라리 죽고 싶었다

지명수배됐다는 말이 들렸다. 서울에 살던 누나 집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불심검문에 걸리면서 도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근처 파출소로 데려가는가 싶더니 그날 저녁 계엄사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진 상무대 영창으로 보내졌다.

투옥된 사람들의 행동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부채꼴 모양의 방에서 아침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정좌 자세로 앉아있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두들겨 맞았다. 좁은 방에 100여명이 이상이 갇혀 있다 보니 제대로 누워 잠을 청하기도 어려웠다.

누울 자리가 있더라도 구타로 인한 상처 때문에 누울 수 없었다. 진술을 강요하며 20여일간 계속된 구타와 고문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차라리 죽겠다며 자살을 시도한 이도 부지기수였다. 심문을 받고 돌아오면 ‘그래도 살았으니까...’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이선 의원의 몸 곳곳에는 지금도 당시의 상흔이 남아 있다.

<>
▲사형 선고·아버지의 탄식...사형수에서 무기수로

1981년 1월 21일, 국가는 그에게 ‘내란선동죄’, ‘내란중요임무종사죄’ 등의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했다. 등 뒤에서 아버지의 탄식이 들려왔다. 죽었구나 싶었다.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해 내내 미안했던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죽게 두지 않았다.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았고, 4년 2개월간의 옥살이 후 1984년 4월 특별사면을 통해 세상으로 나왔다. 그날의 진실은 감춰졌고 세상은 그를 폭도라 부르며 손가락질했다. 제대로 된 직장도 다닐 수 없었다.

▲“5월에 진 빚...평생 갚으며 살아야죠”

잘못된 세상을 향해 잘못됐다고,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외쳤을 뿐인데 군인들의 총칼에 다치고 죽어야 했던 수많은 시민들이 폭도로 매도당하는 현실이 서글프고 억울했다. 그날의 감춰진 진실과 실상을 알리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었다.

이선 의원은 말한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선 이들은 ‘민초’들이었다고. 1980년 군사독재에서 나라를 구하겠다며 나섰던 이들도 모두 ‘민초’들이었다고.

거창한 구호는 몰라도 잘못된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행동으로 실천한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이 나라가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그들에게 큰 빚을 졌고,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나는 그 빚을 갚기 위해 민초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을 보태고 있노라고....
박미경 기자 mkp0310@hanmail.net

오늘의 인기기사